지금 '부산'이라 하면 자갈치와 해운대, 남포동과 서면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지역을 대표하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10년 8월 이전까지, 이 땅의 상위 지명은 부산이 아니라 동래였다. 부산은 동래부에 속한 여러 포구 중 하나에 불과했고,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정반대로 동래가 부산을 관할하는 이름이었다.
동래의 역사는 무려 이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시대 장산국, 또는 거칠산국이라 불리던 이 지역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757년부터 동래군이라는 이름으로 편제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동래현, 동래도호부로 그 지위를 이어갔다. 조선시대 동래부사는 오늘날로 치면 부산시장에 해당하는 자리였고, 그가 집무를 보던 동헌은 동래읍성 안에 있었다. 동래읍성은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관아와 향교를 아우른 이 지역의 행정·문화 중심지였다. 조선의 북쪽 관문이 의주라면, 남쪽 관문은 바로 동래였다. 대한해협 건너 일본과 맞닿아 있었기에, 동래는 국경 도시로서 늘 각별한 안보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 무게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순간이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그해 4월 15일, 왜군이 동래성을 에워싸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백성들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의하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고 회유하자, 송상현은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는 말로 답했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진 치열한 항전 끝에 동래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송상현을 비롯한 수많은 군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동래가 단순한 지방 고을이 아니라, 나라의 관문을 지키는 최전선이었음을 뼈아프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전쟁 이후에도 동래는 대일 외교의 창구라는 역할을 이어갔고, 조선 후기에는 온천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이 오랜 행정·문화적 중심지에는 자연스레 양반과 유교 문화가 두텁게 뿌리내렸다. 탈춤인 동래야류, 동래한량춤과 동래학춤 같은 전통 예술이 이 땅에서 전승된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며칠씩 이어졌다는 동래줄다리기에는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만으로도 동래가 지녔던 구심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산포와 초량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조성되고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도시의 무게중심은 서서히 해안 쪽으로 옮겨갔다. 결정적인 전환은 1910년에 찾아왔다. 일제는 동래부를 부산부로 개편했고, 이때부터 상위 지명이던 동래와 하위 지명이던 부산의 지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래의 상징들을 지우려 했다. 동래읍성 동헌 앞을 지키던 망미루를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버렸고, 많은 인파가 모여 반일 정서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1938년에는 동래줄다리기마저 강제로 중단시켰다.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와 도시화를 거치며 대부분 헐려나갔지만, 지금도 동래구청이 그 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오랫동안 지역 어르신들 사이에는 "읍성 밖으로는 관청을 옮길 수 없다"는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었고, 실제로 몇 차례 검토된 이전 부지들도 읍성 경계 밖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땅 밑에서 옛 유물이 계속 발견되는 것도 이곳이 오랜 세월 사람이 밀집해 살아온 중심지였음을 다시 한번 일러준다.
해방 이후 동래는 1957년 구제 실시와 함께 동래구로 부활했다. 당시 동래구는 지금의 수영구, 해운대구, 금정구, 연제구까지 아우르며 부산 전체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46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컸다. 1960~70년대에는 동래온천과 해운대, 광안리 해수욕장, 금정산과 범어사를 품은 신혼여행지이자 관광명소로도 명성을 날렸다. 지금은 여러 구로 쪼개져 옛 위세를 잃은 듯 보이지만, 동래라는 이름 안에는 이천 년 세월 동안 이 도시를 지탱해 온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다. 화려한 해안가의 스카이라인 이면에서, 부산이라는 도시의 진짜 시작점을 묻는다면 그 답은 언제나 동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