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구 센텀시티의 마천루 사이를 걷다 보면, 이곳이 한때 비행기가 뜨고 내리던 활주로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나루공원 야외무대 인근에 작은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수비의 역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 돌은, 화려한 빌딩숲으로 뒤덮인 이 땅이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활주로와 관제탑이 있던 공항이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일제는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이 일대에 군용 비행장을 만들었다. 수영강과 온천천에서 실려 내려온 토사가 오랜 세월 쌓여 만들어진 이 평야지대는, 넓고 평탄해 비행장을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 이 비행장은 '수영비행장'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948년 10월에는 부산과 서울을 잇는 국내 최초의 민간 항공 운송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아직 도로도 철도도 넉넉지 않던 시절, 하늘길을 여는 관문이 부산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한때 이 활주로 위로는 프로펠러 여객기가 뜨고 내렸고, 인근 주민들은 창문 너머로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일상처럼 바라보며 살았다고 한다. 도심 한복판에 공항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넓은 평지가 흔하던 시절 부산의 지리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수영비행장의 역할은 6·25전쟁을 거치며 더욱 커졌다. 임시수도가 된 부산으로 물자와 병력이 몰려들던 그 시절, 이 비행장은 유엔군의 K-9 공군기지로 지정되어 전시 수송의 핵심 거점 역할을 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활주로에 뜨고 내리는 수송기 한 대 한 대가 곧 생명줄이었던 셈이다. 종전 이후 1958년에는 명칭이 '부산(수영)비행장'으로 바뀌었고, 1963년 9월 30일에는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정식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김해국제공항이 있기 전, 부산 사람들에게 하늘길이라는 개념을 처음 심어준 곳이 바로 이 자리였다. 일반적으로 1958년까지는 수영비행장이 맞다. 그런데 1958년 이후 공식 명칭은 부산비행장, 그리고 1963년 부산국제공항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수영비행장으로 불리웠고 그리 기억한다. 현재는 센텀지역의 '수비삼거리' 라는 명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도시가 성장하면서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한 공항은 점점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1973년, 민간 항공 기능은 김해국제공항으로 옮겨갔다. 옛 부산비행장 부지는 이후로도 한동안 군사용으로 남아 육군본부 소관의 활주로와 격납고로 쓰였다. 도심 한가운데 넓은 땅이 오랫동안 비행장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1996년 4월, 부산광역시와 육군본부 사이에 국유재산 매매계약이 체결되면서 이 땅은 마침내 부산시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 부지는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났다. 활주로가 있던 자리에는 국제전시컨벤션센터 벡스코가 들어섰고, 그 주변으로 초고층 아파트와 백화점, 방송사와 첨단 업무시설이 빼곡히 채워지며 지금의 센텀시티가 완성되었다. 활주로 위를 오가던 비행기 대신 그 자리에는 마천루가 줄지어 섰고, 관제탑이 있던 하늘 위로는 초고층 빌딩의 조명이 대신 반짝이게 되었다. 센텀이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100을 뜻하는 단어에서 따온 것으로, 100퍼센트 완성된 첨단 신도시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2013년 6월, 개발이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센텀시티는 부산을 대표하는 국제업무지구이자 마이스 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일제의 강제 동원으로 시작해 전쟁의 관문을 거치고, 대한민국 첫 국제공항이라는 영예를 안았다가, 끝내 빌딩숲으로 변모한 이 땅의 이력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압축된 성장사이기도 하다. 강제로 끌려나와 활주로를 닦아야 했던 식민지 시절의 주민들, 전시 수송기의 굉음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피란민들, 그리고 그 위에 마천루를 올린 오늘날의 도시계획자들까지, 한 뼘의 땅 위로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겹겹이 지나갔다. 오늘도 센텀시티의 대로를 오가는 사람들 중 이곳이 한때 활주로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나루공원의 작은 표지석 앞에 잠시 멈춰 선다면, 지금 발 딛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여러 겹의 역사를 품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