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의 술, 금정산성막걸리 이야기
금정산 등산로를 타고 산성마을에 이르면, 땀에 젖은 몸으로 평상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는 사람들을 흔히 만난다. 두부전골이나 파전 한 접시를 곁들여 산행의 피로를 씻어내는 것이 이 마을의 오랜 풍경이다. 뽀얗고 걸쭉한 그 술은 이곳에서만 나는 누룩과 물로 빚어진다는 자부심을 담고 있다. 다른 막걸리보다 산미와 탄산이 강하고 걸쭉한 편이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잊기 힘든 개성을 지녔다는 평도 많다. 전국에 수많은 막걸리 브랜드가 있지만, 마을 이름과 산 이름을 그대로 상표로 쓰는 술은 흔치 않다. 금정산성막걸리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조선 숙종 32년, 그러니까 17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금정산성을 새로 쌓던 그해, 전국 각지에서 인부들이 징발되어 이 산자락에 모여들었다. 산성 주변에는 이미 화전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래전부터 누룩을 띄우고 막걸리를 빚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힘든 축성 노역을 마친 인부들은 저녁마다 이 마을의 막걸리로 갈증과 피로를 씻어냈다. 노역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의 입을 통해 산성마을 막걸리의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고 전해진다. 해발 400미터 산기슭의 서늘한 기후와 맑은 물, 그리고 발로 직접 밟아 디디는 전통 방식으로 띄운 누룩이 어우러져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 내기 힘든 맛을 냈다.
그러나 이 유서 깊은 술도 근대 이후 오랫동안 떳떳하게 빛을 보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거치며 개인이 술을 빚는 행위 자체가 단속 대상이 되었고, 산성마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대로 이어온 방식대로 누룩을 밟고 술을 빚었지만, 이는 법적으로는 밀주였다. 단속반의 눈을 피해 산속 깊은 곳에서 몰래 술을 담그고, 급할 때는 항아리를 땅에 묻어 감추던 시절이 이어졌다. 맛과 전통은 그대로였지만, 세상은 이 술을 떳떳한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이 술이 양지로 나오게 된 데에는 뜻밖의 인연이 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는 군인 시절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하며 산성마을을 즐겨 찾았고, 그때 마신 막걸리 맛을 오래 기억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부산을 찾을 때면 이 마을의 막걸리를 찾았고, 여전히 밀주 단속의 대상이라는 사정을 전해 듣자 이를 합법화하도록 했다. 1979년, 대통령령 제9444호로 금정산성막걸리는 마침내 대한민국 민속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오랫동안 숨어 빚어야 했던 술이 하루아침에 국가가 인정하는 전통주가 된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마을 주민 백오십여 명이 뜻을 모아 금정산성토속주식회사를 세우고, 각자의 집에서 따로따로 빚던 술을 한데 모아 체계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금정산성막걸리는 500년을 이어온 족타식 누룩, 즉 발로 직접 밟아 디뎌 만드는 누룩 제조법을 고수하고 있다. 밀가루를 반죽해 둥글고 납작하게 빚은 누룩을 천으로 감싼 뒤 맨발로 꾹꾹 밟아 공기를 빼내고 밀도를 높이는 이 과정은, 자연 상태의 곰팡이와 효모가 고르게 자리 잡도록 돕는 조상 대대로의 지혜다.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여느 막걸리와 달리, 여전히 사람의 발과 손을 거쳐야 완성되는 술이다. 산성 축조에 동원되었던 이름 모를 인부들의 갈증을 달래주던 술이, 금기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주로 전국 각지의 술상에 오르고 있다. 등산객들이 산행을 마치고 마을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는 지금의 풍경도, 따지고 보면 삼백여 년 전 축성 인부들이 하루의 노역을 막걸리로 씻어내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정산성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켤 때, 그 안에는 산성을 쌓던 사람들의 노고와, 몰래 술을 빚어야 했던 세월과, 마침내 떳떳하게 이름을 얻은 어느 마을의 역사가 함께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