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명 걸으러 나왔는데, 자꾸 먹는 이야기
아직 산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배가 든든했어요. 등산을 하러 나온 날이었고 제 앞에는 산채비빔밥과 해물파전이 놓여 있었죠. 나무 아래 앉아 초록을 보고 있으니 산에 온 기분도 충분했어요. 이 정도면 오늘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지만, 물론 등산은 이제 시작이에요. 금정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다가 또 밥 이야기부터 하고 있네요.
2022년 7월의 그 토요일에는 원래 오후 늦게 출발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도 시원해서 조금 일찍 나가기로 했죠. 오후 1시쯤 만나 범어사로 향했고, 2시에는 입구의 금정산장에 도착해 있었어요. 전에 산에서 내려와 맛있게 먹었던 곳이라 다시 들렀는데,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어요. 일단 먹고 올라가기로 한 거예요.

실내 자리도 있었지만 야외로 갔어요. 테이블 위로 나뭇잎이 가득해서 고개를 들면 초록이 보였거든요. 산채비빔밥에 고추장 소스를 몇 번 둘러 비벼도 맵게만 느껴지지 않았고, 함께 나온 콩나물국을 곁들이니 한 상이 좋았어요. 그날 제일 마음에 든 건 비빔밥이었어요. 해물파전도 나눠 먹고 나니, 이제 정말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배가 찼죠.
산에 다녀온 날은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기억할 것 같은데, 제 기억은 그보다 앞선 식탁에서 시작해요. 나무 아래 앉아서 밥을 먹고 있던 시간이 그날의 산행에 붙어 있거든요. 늦은 오후까지 기다리지 않고 일찍 나와서 좋았고, 올라가기 전에 들르길 잘했다 싶었어요. 든든하게 먹은 뒤 기분 좋게 출발했다는 결말까지 포함해서요. 다음에 누가 그날 뭐가 좋았냐고 물어봐도, 저는 아마 비빔밥 이야기부터 할 거예요.

바다를 보러 갔다가, 불 앞에 오래 앉았어요
바다에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부산에 살면서도 청사포에 오면 여행 온 기분이 들곤 했는데, 풍경을 보고 돌아오는 것만으로 끝낸 날보다 그 앞에서 무엇을 먹었는지가 함께 떠오르는 날이 많아요. 다릿돌전망대에서 청사포 쪽을 내려다본 낮의 사진과, 도희네 조개구이 창가에 앉았던 밤의 기억이 그렇게 한 동네 안에 남아 있어요.

도희네의 창가에 앉은 건 2021년 10월, 저녁 7시쯤이었어요.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서 바다에 비친 달빛이 예쁜 와중에도 추위가 꽤 신경 쓰였죠. 가게에 들어서며 잠시 발을 멈춘 건 고양이 때문이었어요. 사장님 곁에서 꾹꾹이를 하는 모습에 한눈을 팔다가 안으로 들어갔는데, 일요일 저녁이라 손님들이 많았어요. 저희는 1층 창가에 앉았고 주문을 하자 불이 들어왔어요. 그 순간만큼은 바다보다 불이 더 반가웠던 것 같아요.
가리비부터 하나씩 올려 굽고 나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조개들이 있었어요. 키조개는 위에 올려진 버섯과 치즈를 함께 섞어 떠먹었는데, 조개를 다 먹을 때까지 치즈가 넉넉해서 좋았어요. 구워 먹는 방법을 따라 여기까지는 잘 왔는데, 전복 앞에서는 자신감이 끝났어요. 어디를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지 몰라 직원분께 부탁드렸거든요. 바쁜 와중에도 손질을 도와주셔서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었어요. 잘 모를 때는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아주 실용적인 조개구이의 교훈이었죠.

조개를 거의 다 먹어갈 때 전복해물라면이 나왔어요. 조개와 새우, 전복에 수제비까지 들어 있었는데, 불판에 올려 놓고 먹으니 마지막 한 젓가락까지 뜨끈했어요. 그날의 식사가 유독 잘 떠오르는 건 이 마지막 장면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들어올 때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정신이 없었는데, 식탁에서는 끝까지 따뜻한 걸 먹고 있었으니까요. 여행 온 것 같던 청사포의 밤에, 오래 앉아 있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던 셈이에요.
모든 외출을 이렇게 든든하게 먹으며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만, 식사와 산책의 순서가 늘 같을 필요는 없더라고요. 산에서는 먼저 먹었고 청사포에서는 저녁을 길게 보냈는데, 남천동에서는 빙수를 먹고 나서야 발걸음이 바다로 이어졌어요. 이번에는 2022년 초여름의 이야기예요. 친구들에게 맛있는 빙수를 소개해 주려고 남천녹차팥빙수에 갔던 날이었죠.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조금 더 걷고 싶어졌어요
그날은 1층 실내에 앉아 팥빙수를 먹었어요. 얼음에 팥, 녹차가루를 조금 올린 단순한 구성이에요. 이것저것 골라 올릴 것도 없고, 적당히 달아서 숟가락이 잘 가요. 빙수 가게에서 오래 머무는 대신, 다 먹은 뒤에는 바다도 구경할 겸 밖으로 나섰어요. 식탁에서의 오후가 끝나자 해변에서 보낼 시간이 이어졌죠.

빙수를 다 먹은 뒤 친구와 광안리로 걸어갔어요. 산책도 하고 바다도 볼 겸해서요. 해변에는 패들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있었고, 해바라기로 꾸며 둔 곳도 보였어요. 빙수 가게의 식탁에서 끝날 줄 알았던 기록 뒤에 바다 사진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이런 덤 같은 시간이 참 반가워요. 빙수 한 그릇을 먹으러 온 날에 바다까지 보고 돌아가게 됐으니, 남천동에서의 약속이 조금 더 길어져도 좋았어요.

걷기 좋은 날을 기다릴 때면 산이나 바다부터 떠올리는데, 막상 다녀와서 오래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식탁 주변을 맴돌아요. 등산 전에 배를 채워버린 일, 전복 손질을 몰라 도움을 청한 일, 빙수를 먹고 친구와 광안리까지 걸어간 일. 그렇다고 산책 이야기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에요. 나무 아래의 밥상에도, 추운 바다 앞의 불판에도, 빙수 뒤의 해변에도 그날 걸었던 시간이 함께 들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다음에 부산에서 조금 걷고 싶은 날이 오면, 저는 먹고 싶은 것도 같이 골라두려고요. 한 동네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서는 또 음식 이야기를 길게 하겠죠. 그래도 끝에는 분명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잘 먹었고, 잘 다녀왔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