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을 쌓아놓고도 커피를 더 시켰다
에스프레소에서 멈췄어야 했어요. 다 마신 작은 잔들을 쌓고 사진까지 남겼는데, 저는 아인슈페너를 더 주문했고 테이블에는 아메리카노까지 놓였죠. 커피도 맛있고 동생과 이야기 나누기에도 좋아서 또 오고 싶었던 곳. 그런데 그날 밤에는 동생도 저도 잠을 못 잤어요. 에스프레소만 마시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던 사람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요. 전포의 바이스벌사를 떠올리면, 아직도 그 작은 잔들과 잠 못 잔 밤이 함께 생각나요.

2022년, 동생과 바이스벌사에스프레소를 찾았던 날이에요. 처음에는 커피보다 살짝 어둑한 공간에 마음이 갔어요. 밖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테이블도 있어 한번 이용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반깁스를 하고 간 터라 안으로 들어가 앉았죠. 바이스벌사 로고가 있는 조그만 잔과 티스푼이 귀여웠고, 벽면에도 에스프레소잔이 놓여 있었어요. 잔은 벌써 마음에 드는데 그 안의 진한 커피를 마시는 일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요.
직원분이 원두부터 에스프레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고, 커피를 가져다주시면서도 어떻게 마시면 되는지 찬찬히 알려주셨어요. 저는 에스프레소와 레이어에 갭 블렌드를, 동생은 바닐라 림과 에스프레소 크림에 시핑 블렌드를 골랐죠. 제가 주문한 클래식을 먼저 마시고 동생이 고른 바닐라 림도 맛봤는데, 원두에 따라 느껴지는 맛이 달라 재미있었어요. 처음에 조금 부담스럽던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어느새 서로 다른 잔들을 맛보고 있었고요.
크림이 있는 잔은 특히 다가가기 편했어요. 수제 모카크림에 시나몬 가루를 더한 에스프레소 크림은 스푼으로 크림부터 떠서 맛보면 됐는데, 달달한 부분이 있어 좋더라고요. 바닐라 림은 잔에도 숙성시켜 만든 바닐라 설탕이 묻어 있었어요. 같은 에스프레소인데 어떤 잔은 크림부터, 어떤 잔은 가장자리에 묻은 설탕과 함께 맛보게 되는 게 흥미로웠죠. 진한 커피 한 모금을 어떻게 마실지 몰라 망설이는 동안, 작은 잔들 안에 이런 맛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동생과 제가 가장 맛있게 마신 건 레이어였어요. 쓴맛과 단맛뿐 아니라 짠맛, 신맛까지 느껴져서 그중에서도 유난히 독특했거든요. 함께 주문한 레몬크림 도넛은 크림이 넉넉하고 적당히 달아 커피와 잘 맞았어요. 처음에는 에스프레소만 마시는 게 부담스럽더니, 서로 고른 잔을 맛보고 도넛까지 곁들이며 꽤 즐겁게 마신 셈이죠. 다 마신 잔이 쌓이니 이번에는 그 작은 컵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요.

제가 차곡차곡 올려둔 잔을 동생이 다시 세팅해줬어요. 그렇게 사진을 찍고도 아인슈페너를 추가한 사람이 저예요. 크림이 가득 올라간 커피도 좋았고, 테이블에는 시원한 아메리카노까지 놓였죠. 앞서 작은 잔으로 이것저것 맛봤다는 사실을 그때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요. 그날 밤의 뒤늦은 후회까지 합쳐놓으니, 이곳에서 커피를 마신 기억에는 조금 머쓱한 구석도 있어요. 컵은 예쁘게 쌓아뒀지만 주문을 멈출 타이밍까지 잘 골랐던 건 아니니까요.
동생과 간 전포의 카페가 늘 이랬던 건 아니에요. 스트럿커피에서는 작은 나무 받침에 두 잔을 나란히 놓고 마셨어요. 잔을 여러 개 쌓은 사진 대신 창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 날이죠. 바이스벌사의 어둑한 실내에서 이것저것 맛보던 때를 생각하다가 이 사진을 보면, 같은 동생과 간 카페인데도 그곳에 앉아 있던 기분이 사뭇 달라져요.

스트럿에 갔던 건 추운 날의 평일 오전이었어요. 주택을 바꾼 카페라는데 안에 들어서니 천장이 높고 문과 창이 유리로 되어 있어 답답하지 않았고, 곳곳의 식물이 편안한 분위기를 더했죠. 동생은 창문이 살짝 감옥 같다고 했지만 저는 햇빛이 잘 들어와 따뜻한 게 좋았어요. 같은 창을 보고서도 이렇게 다른 말을 붙이는 사람과 커피를 마시러 다닌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꽤 즐거운 일이에요.
추운 날이라 제 잔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골랐고, 동생은 필터커피를 주문했어요. 작은 나무 받침에 잔을 나란히 올려놓으니 이번에는 서로 다른 커피 두 잔으로도 충분했어요. 함께 나온 원두 카드에는 동생이 고른 라 살리나를 살구와 흑설탕으로 설명해 놓았더라고요. 제 아메리카노도 맛있었고, 잔이 예뻐서 아래에 새겨진 스트럿이라는 이름까지 찍어뒀어요. 커피를 마시면서도 컵 구경을 놓치지 않는 건 여기서도 똑같았네요.

오후에 손님이 많아지기 전 카페를 나왔어요. 새로운 커피를 여러 잔 주문하지 않았어도 동생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는 기억은 그대로 남았죠. 바이스벌사에서 서로 고른 맛을 궁금해하던 것도 좋았지만, 제가 고른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햇빛을 받는 오전도 좋았어요. 전포에 간다고 언제나 메뉴판 앞에서 새로운 이름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니겠더라고요.
친구와 갔던 얼룩에서는 커피 다음 일정이 먼저 정해져 있었어요. 12월 초, 프리윌피자 오픈 시간에 맞춰 가기 전에 커피부터 마시기로 한 날이죠. 얼룩은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넓었어요. 창가도 있고 가운데 큰 테이블도 있었고, 초록 식물과 나무 가구 사이에는 크리스마스트리도 놓여 있었죠. 평일 낮이라 손님이 많지 않아 원하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어요.

구경할 것이 많아 커피 외에도 자꾸 눈길이 갔어요. 그릇과 컵이 진열되어 있고, 가죽 소품도 있었거든요. 이니셜을 새길 수 있다는 안내와 작업하는 기계도 보였는데, 저는 그중 책갈피가 갖고 싶었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해도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한 잔 마시러 들어갔다가 커피와 상관없는 물건에 마음이 가는 일도 있죠. 얼룩은 그렇게 둘러보는 동안에도 포근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곳이에요.
얼룩 커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어요. 오랜만에 마신 라테는 고소하고 밸런스가 잘 맞았는데, 잔 위의 라테 아트도 예뻐서 사진을 남겼죠. 그릇이며 책갈피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들어오길 잘했다 싶던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한 번 더 마음이 갔어요. 친구와 피자를 먹으러 가기 전에 들른 카페였지만, 그날 얼룩에서 보낸 시간도 식사만큼 기억에 남았어요.

전포에서 어떤 커피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잠깐 고민하게 돼요. 바이스벌사의 레이어를 말하려다가, 스트럿의 창문을 감옥 같다고 하던 동생이 생각나고 얼룩에서 갖고 싶었던 책갈피도 떠오르거든요. 함께 간 사람과 그날 눈에 들어온 것들이 커피 맛에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도 동생과 바이스벌사에 가게 된다면 작은 잔들을 궁금해할 테지만, 빈 잔을 쌓고 난 뒤에는 추가 주문을 한 번 더 생각해보려고요. 아인슈페너는 다음 약속으로 남겨두면 되니까요. 그러면 마시고 싶은 것도, 또 만날 이유도 하나씩 남잖아요.


